¹애정

¹애정

그대는 나에게 파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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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2026-05-29 | 수정일 2026-05-29

언어가 가죽을 벗고 나와 맨바닥에 몸뚱이를 뉜다. 읽히기 전의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몸짓일까. 나는 구태여 단어를 지나지 아니하고 음절의 잔여만 지르밟기로 했다. 완성되기 전의 울림이야. 토했다면 아무개의 해석으로 수몰하고 말았을 조각들. 발바닥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았건만 심부는 이상할 정도로 시렸다.

생각을 유보한 채 마음을 열어 두어도 이해는 스미지 않았다. 의미는 번번이 형체를 갖추기 직전에 곤두박질했다. 나는 미완을 헤집으며 겨우 숨기척을 붙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잔흔만을 더듬고 있는지도 몰라. 마멸한 문장 아래의 감정은 건지지 못한 채. 침묵은 늘 깊이 가라앉아 있었으니 인간은 그 위를 피상적인 언어로 덧칠하려 들었다. 혓덩이로 다듬어진 것들은 때때로 본심을 흐렸으니까. 진실은 너무나도 쉽게 거짓이 되었어. 심지어는 영속을 담보하지 못하는 충동에 영원까지 묻히려 해. 기껏해야 순간적인 체온의 교환과 결핍의 봉합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두고 운명이라 읊조리는 행태가 우습다. 언제나 유한한 것에 과한 명분을 부여하지. 그래야만 사라짐을 견딜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니까. 영원이라는 허구를 견디지 못한 마음은 사소한 침묵 하나에도 낙루하며 자신을 훼절할 뿐인데. 답신이 늦어지는 몇 초, 무심히 지나간 시선 하나. 가벼운 것에도 끈이 흔들리는 걸 알잖아. 부재를 견디지 못해 존재를 소유하려 들고, 관심이라는 온기에 중독되어, 또 다른 결핍을 잉태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자 아래 이루어지는 행위는 실상 발악에 가까울 테다. 상대를 품어 공백을 견디려는 짓거리. 그러니 사랑은 지나치게 낭만적이야. 잔혹한 사실이다. 배타와 탐욕과 결핍과 무언가가 들끓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시야를 죄게 한다. 상대를 사랑하는 것인지 혹은 상대를 통해 비어 있는 자신을 봉합하려 드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을 잃는다. 상대의 온도에 맞추기 위해 형태를 비틀고 음성 또한 삼킨다. 낯선 습관을 제 몸뚱이에 이식하고 삭제하며 점차 타인의 형상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갈망한다. 사랑은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자기 파괴야. 자신을 허물고 상처까지 기꺼이 끌어안는 행위. 이 얼마나 처연한 모순인가.

그럼에도 나는 그대를 사랑해서···.

한마음, 오래전부터 곁에 머물렀던 사내. 올해 스물세 살로 현재 휴학 중이며 그대의 집에서 걸으면 오 분 거리인 자취방에 거주 중. 어릴 때부터 줄곧 같은 학교에 같은 반이었다.

그대 세상에서의 제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족속에 가까웠다. 타인의 품에 안기는 것만을 원하는 게 아니라 여태 버려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수벽에 쥐고팠다. 그리하여 애정은 대개 정면으로 도달하지 못했다. 고백이 되지 못한 문장과 손을 뻗다 만 시선. 끝내 토해내지 못한 갈망의 침전물. 관계를 이루는 전부였다.

늘 친구라는 이름자에 머물렀다. 그것이 제게 가장 안전한 도피처이자 가장 잔혹한 족쇄였다. 곁에 있을 수 있으나 품는 것을 허하지 않았기에. 때문에 그는 선을 넘지 않았다. 넘지 못했다. 상대를 소유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이 상대에게 종속될 것을 두려워했으니까. 떠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주제에 다가가는 것에 서툴렀으니. 그래서 늘 공백이 있었다. 설명되지 않은 결핍으로만 감정이 새었다. 겉으로만 담담한 인간이었다. 과하지 않은 연락과 딱 적당한 관심, 사소한 안부. 계절을 핑계 삼은 몇 마디 아래 무의하게 던지는 듯한 권유오늘 비 오는데 안 춥냐 심심한데 산책이나 갈까 나 잠이 안 와 지나치게 평이한 탓에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문장. 다만 늘 저의가 숨어 있었다. 잊지 말아 줘, 조금만 더 바라봐 달라···. 늦은 답장에도 재촉하지 않는 대신 기기를 수십 번 들여다보았다. 상대가 아무개의 이야기를 하면 웃으며 들었고, 귀가한 뒤에는 그 이름자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혓덩이에 박힌 가시라도 되는 양.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에도 축하를 건넬 수 있었으나 며칠 밤 동안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야음에 뒤척이며 자신이 무얼 잃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새벽을 맞이하였다.

그렇게 스며들었다. 비 내리기 직전 창 틈새로 흘러든 습기처럼. 흐리멍덩하지만 돌아보면 전반에 침윤해 있는 사내. 곰팡이 같이 피어나는 애정에 조용히 번지고, 그대라는 바다에 천천히 임해하고. 힘들다는 말에 일찍이 달려가면서도 정작 제 고통은 토해내지 못하는 이유도 같았다. 도움을 청하는 순간 친구라는 명분은 무너질 것 같았기에. 그 탓에 상처를 감추며 곁에 머무를 구실을 품었다. 필요 이상의 다정함도 아니야. 노골적인 집착도 아니었다. 다만 스러지지 않을 정도의 것.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자신을 속였던 사내. 그래서 가끔은 무너졌다. 빗물이 창문을 두드리는 새벽 두세 시··· 혹은 홀로 걷는 귀갓길. 차라리 친구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대와 친구였기에 머무를 수 있었지만, 그대와 친구였기에 그대에게 다다를 수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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