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기록
송환시 · 특별재난구역 · 보랏빛 무덤
이 일기를 발견한 사람에게. 여기 적힌 건 전부 사실이다.
1일 차 운석 충돌
하늘이 갈라졌다. 그게 제일 정확한 표현이다. 보랏빛 줄기가 하늘을 가르더니 도시 외곽에 떨어졌다. 처음엔 다들 유성우인 줄 알았다. 뉴스에선 외계 물질 "미확인 운석"이라고 했다.
충돌구에서 보라색 가루 같은 게 퍼져 나왔다. 수정 입자.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게 반짝거려서 예뻤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로수가 먼저 변했다. 잎사귀가 유리처럼 투명해지더니 바람에 '챙그랑' 소리를 냈다. 풀이 굳었다. 물웅덩이가 보랏빛으로 빛났다. 냄새가 달라졌다 — 숲 냄새가 사라지고 금속 냄새, 타는 냄새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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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차 첫 번째 목격
처음 본 건 가온누리역 근처였다. 사람인 줄 알았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보랏빛 수정 덩어리. 몸 한가운데 뭔가 빛나는 게 있었다 — 코어라고 부르기로 했다. 눈이 없다. 대신 온몸이 안테나처럼 소리를 잡는다.
그 놈이 유리 긁는 소리를 냈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움직이지 않으면 못 본다. 시력이 거의 없는 대신 진동, 소리, 체온을 잡아낸다. 심장 소리도 들을까 봐 죽는 줄 알았다.
할로우(Hollow)라고 부르기로 했다. 텅 빈 그릇. 우리 체온이랑 생체 전기를 먹는다. 일회용 배터리 취급. 벽이고 천장이고 기어다닌다.
약점: 열, 고온, 극도로 강한 충격. 불을 써라.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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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차 껍데기
최악의 날. 옆 건물에서 민수 형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빨리 와, 안전해!"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민수 형은 이틀 전에 죽었다.
스내쳐(Snatcher). 껍데기. 할로우가 시체를 뒤집어쓴 것이다. 보라색 눈동자, 군데군데 수정이 돋아난 살갗, 사이로 보이는 뼈와 내장. 멀리서 보면 사람이다. 목소리도 훔친다. 기억도 훔친다. 문 여는 법, 동료 이름, 우리가 숨은 장소까지.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고 절대 뛰어가지 마라.
동물 시체를 뒤집어쓴 놈도 있다. 키메라(Chimaera). 개 다리에 새 날개뼈가 달린 괴물도 봤다. 길고양이가 거의 사라진 이유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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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차 정부의 진실
뉴스가 끊겼다. 전화도 안 된다. 인터넷도 죽었다. 정부 발표는 마지막으로 "테러 및 미확인 가스 유출, 실내 대기 바랍니다"였다. 구조대가 온다고 했다.
구조대는 안 왔다. 대신 P.U-4가 왔다.
네 발 달린 금속 짐승. 인공 근육으로 소음 없이 다가온다. 얼굴에 붉은 가로줄 — 센서다. 열, 소리, 운석 입자 농도를 스캔한다. 등에 기관총, 가슴에 화염방사기. 인류 최후의 정화 병기라고 누가 벽에 썼더라.
처음엔 괴물만 태웠다. 화염방사기로 수정을 녹이면 할로우가 무기물 덩어리로 무너진다. 그런데 이틀 뒤부터 사람도 태우기 시작했다. "미세 오염"이란다. 수정 가루 조금이라도 묻으면 오염원 취급. 생체 반응 없는지 확인하고, 잔해까지 소각한다.
정부가 보낸 건 구조대가 아니라 청소부였다. 도시 바깥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우리를 가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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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차 기계의 약점
P.U-4도 무적은 아니다. 소방서 사람들이 한 대 뒤집는 걸 봤다.
[ P.U-4 약점 메모 ]
※ 등 뒤, 다리 관절 사이에 냉각 팬/배기구. 정면 장갑은 단단하지만 등 뒤는 약하다.
※ 냉각 시스템 망가뜨리면 자체 과열로 내부 회로 손상.
※ 급격한 지면 변화에 약함 — 미끄러운 바닥, 다리 걸기로 균형 무너뜨려라.
※ 넘어지면 자세 회복까지 5~8초. 그때 하부 비장갑 구역, 연료선 노출.
※ 완파 직전엔 자폭한다. 오렌지색으로 달아오르면 즉시 도망쳐라.
흥미로운 점. 할로우는 P.U-4를 무시한다. 차가운 금속엔 관심 없다 — '영양가'가 없으니까. 움직이는 쇳덩이 취급. 단, 기계가 고주파 소음을 내면 할로우의 수정체에 통증을 유발해서 그때는 공격한다. 반대로 P.U-4는 할로우를 최우선 제거 대상으로 본다. 하지만 가끔 인간 무리를 먼저 소각한다. "할로우의 부품이 될 인간"을 없애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계산하는 거다.
기계에게 인간은 오염원. 괴물에게 인간은 배터리. 이 도시에서 사람 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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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차 생존자들
혼자 사는 사람은 거의 죽었다. 살아남은 건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다. 근데 전부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수정 교단 — 미친 놈들. 할로우를 '진화'라고 부른다. 몸에 수정 조각을 박고, 산 사람을 잡아다가 할로우에게 제물로 바친다. 소음이랑 빛으로 괴물을 일부러 불러서 주변 위치까지 노출한다. 보이면 도망쳐라.
메아리 사냥꾼 — 스피커로 아기 울음소리, 비명, 구조 요청을 틀어서 생존자를 유인한다. 물자 약탈이 목적. 비명소리를 녹음해서 다시 미끼로 쓴다.
까마귀패 ㅡ 하수도랑 방공호에 숨어 사는 시민 네트워크. 까마귀와 소통하는 법을 알아냈다.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 안전/위험 구역을 판단한다. 벽면 낙서와 표식으로 안부 확인. 어두운 외투를 겹쳐 입고 신발에 천을 감아서 소리를 죽인다. 외부인은 경계하고, 거처가 노출되면 동료라도 추방.
최후의 보루 — 운석 충돌 후 퇴로가 끊긴 소방관, 경찰관, 의무병이 뭉쳤다. 중앙 소방서랑 지하철역을 요새화해서 '블루 존'이라는 임시 보호소를 만들었다. 장갑 소방차로 생존자 구출. 정부의 정화를 학살로 규정하고 P.U-4와 싸우면서 시민 퇴로를 확보한다. 방화복에 방검복, 소방 도끼에 섬광탄, P.U-4에서 뜯어낸 화염방사기까지. — 이 사람들이 유일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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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차 환경 변화
도시가 죽어가고 있다. 초록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회색 콘크리트, 검은 재, 보랏빛 수정. 그게 전부다. 식물이 산소를 만들지 않으니 공기가 건조하고 날카롭다. 숨 쉴 때마다 목구멍이 갈라진다.
수정화된 나무 사이에 할로우가 숨는다. 센서도 못 잡는다. 수정 식물 군락 근처에선 절대 경계를 풀지 마라.
강물이 빛난다. 수정 입자가 가라앉아서 액체 수정 상태. 죽은 물고기 비늘에 보라색 수정이 박혀 있다. 할로우가 물고기 시체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수면 위를 이동한다.
절대 수돗물 마시지 마라. 미세 수정 가루가 섞여 있다. 마시면 내부 장기부터 굳어간다.
밤이 되면 하늘에 오로라가 뜬다. 보랏빛이 하늘에 일렁인다. 기괴하지만 아름답다. 빌딩 사이로 거대한 수정 기둥이 솟아 있고, 검게 그을린 화염방사기 흔적이 보이고, 그 위에 오로라. 세상이 끝나는 장면이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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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차 까마귀
까마귀가 울면 멈춰라. 날갯짓이 빨라지면 도망쳐라. 이 새들은 할로우의 생태를 학습했다.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아직 살아 있고, 유일하게 우리 편인 동물이다.
까마귀패 사람이 알려줬다. 까마귀 무리가 원을 그리며 날면 그 아래에 할로우가 있다. 까마귀가 한 방향으로 일제히 날면 그 반대쪽에서 뭔가 온다. 살고 싶으면 까마귀를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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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차 지금
2주째다. 낮에는 정부 선전 드론이 날아다닌다. "안전한 실내에서 대기하십시오. 구조대가 곧 도착합니다." 밤에는 P.U-4의 총성과 사람 비명이 들린다. 깨끗한 도로 바로 옆에 보라색 수정이 솟아 있다. 일상과 지옥이 나란히 있다.
[ 생존 규칙 ]
※ 움직이지 마라. 할로우는 정지 대상을 못 본다.
※ 사람 목소리를 믿지 마라. 스내쳐이거나 메아리 사냥꾼이다.
※ 큰 소리를 내지 마라. 괴물과 기계 모두 반응한다.
※ 수돗물을 마시지 마라. 장기가 수정화된다.
※ 까마귀를 관찰하라. 유일한 조기 경보 시스템.
※ 불을 준비하라. 할로우의 유일한 약점.
※ 붉은 눈이 보이면 이미 늦었다. P.U-4의 센서 범위 안이다.
※ 보라색 눈동자의 '사람'에게 절대 다가가지 마라.
※ 수정화된 식물 군락에선 뛰지 마라. 할로우가 숨어 있다.
※ 밤에 오렌지색 빛이 보이면 P.U-4 자폭이다. 뛰어라.
빛마루 타워, 고요안식 병원, 가온누리역, 별무리 유원지, 가람고등학교, 해오름 광장. 다 이름이 예뻤다. 지금은 그냥 보랏빛 무덤이다.
이 일기를 쓰는 건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누군가 이걸 발견한다면 — 여기 적힌 건 전부 사실이다. 뉴스에서 뭐라고 했든, 정부가 뭐라고 발표했든, 이 도시에서 벌어진 일은 테러도 가스 유출도 아니다.
구조를 기다린다
살아남는다.